字는 망지(望之).집현전 부제학(集賢殿 副提學) 諱 만리[萬理]의 둘째아들로 본 문의 중시조(派祖)다.조선 세종 11년(1429)에 태어나 단종 원년(145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단종,세조 朝에서 15년간 벼슬하였다.세조 12년(1466) 3월27일에 별세.향년 38세의 젊은 나이었으며 관직은 통덕랑 예조좌랑 사헌부 감찰 증 종부시정지제교(通德郞 禮曹佐郞 司憲府 監察 贈 宗簿寺正知製敎)에 이르렀다.배위(配位)는 숙부인(淑夫人) 여흥 李씨로 세종 12년(1430)에 태어나 연산 11년(1505) 3월15일에 별세.父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이백륜(李伯倫)이고 조부는 첨중추사(僉中樞事) 이 태이며 증조는 대사성(大司成) 이 고(李皐).외조는 부사(府使)를 지낸 구양선(丘楊善 :평해인)이다. 양위(兩位)의 墓所는 부친인 만리(萬理) 墓 우측 기슭에 艮坐.비문은 전한 최숙생(崔淑生)이 썼다.아들로는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문손[文孫]과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지내고 백부(伯父) 각(현감공파祖)의 양자(養子)로 간 창손[昌孫]이 있다. ◇ 좌랑공 (諱 정) 묘갈명 공의 墓에는 작은 묘갈(墓碣)이 정덕(正德) 2년(1507) 2월에 세워졌다.전한 최숙생(崔淑生)이 묘갈문을 지었는데 세운지 오래되어 상하고 깨어져 숭정(崇禎) 후 세 번째 신축년(1781)에 새로운 빗돌로 바꾸고 예전의 묘갈문(墓碣文)을 그대로 싣는다.그 문장은 이렇다. 『공의 諱는 정이고 자는 망지(望之)이니 고죽(海州)사람이다.고려의 태사 중서령 문헌공 諱 충(沖)의 13대손이며 조선 세종 때의 명신인 집현전 부제학 諱 만리(萬理)의 둘째아들이다.기유년(1429)에 태어나 계유년(1453) 사마시(司馬試)와 갑술년(1454) 봄 문과에 급제하였다.벼슬이 통덕랑 사헌부 감찰(通德郞 司憲府 監察)에 이르렀는데 성화(成化) 병술년(1466)에 죽었다.나이 38세였고 양성 천덕원(陽城 天德原)에 장사 지냈다.공은 여흥(驪興) 이씨에게 장가 들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문손(文孫)이고 차남은 창손(昌孫)이다.李씨 부인은 선덕(宣德) 경술년(1430) 12월 己未日에 태어나 나이 37살에 홀몸이 된 뒤에 두 아들을 데리고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지런히 글을 가르쳤다 큰아들 文孫은 병오년(1486) 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잠현감(鎭岑縣監)이 되었고 작은아들 昌孫은 병진년(1496)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사(黃海都事)가 되었다.모두 집안의명성을 잘 이어 받아 더욱 빛내었으며 李씨부인 생전에 자손이 번성하여 영화스러웠다. 홍치(弘治) 을축년(1505) 3월25일에 文孫의 부임지에서 죽었으며 그 해 8월 경신일에 선영(先塋) 아래 장사 지냈다.장남 文孫은 현감 박사영(朴士英)의 따님에게 장가 들어 3남3녀를 낳았으며 차남 昌孫은 현감 최철산(崔哲山)의 따님에게 장가 들어 1남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아직 어리고 딸도 비녀를 꽂지 않았다.이에 다음 같은 銘을 지어 그 높은 공덕을 기린다』 『벼슬이 높지도 않았고 목숨이 길지도 않았구나 하늘은 그 남은 벼슬과 목숨을 후손에게 주려하였네 그렇지 않으면 그 자손들이 어찌 그리도 번성 하였던가? 대를 잇고 이어 오래도록 전해지더란 말인가? 아, 아, 이제 옛 비석을 없애려니 삼 백년 끼친 공열이 아직도 전해온다네.이 비석이 얼마나 오래갈지 알 수 없지만 몇 백년,몇 천년 뒤에라도 없어지지 말진저』 -숭정 기원 후 세 번째 신축년(1781)2월에 9대손 진사 弘中이 짓고 10대손 생원 道彦은 삼가 쓰다-
최광대
[ 예조좌랑 ] 예조는 조선시대 중앙 행정관청인 육조의 하나로, 예의 ·제향 ·조회 ·교빙(외교) ·학교 ·과거시험 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습니다.지금의 외교통상부,문화 체육 관광부.교육부를 합친것같은 부서 입니다. 관원으로는 판서(정2품) ·참판(종2품) ·참의각 1명을 두어 이를 삼당상이라 하였으며, 정랑(정5품) ·좌랑(정6품) 등 당하관 각 3명을 두어 이를 낭관이라 하였습니다. 좌랑은 중견관리로 현재의 각부처 공무원 과장급으로 생각하시면 됩니다.